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카야마 우콘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다카야마 가문은 셋쓰(摂津)국[* 현재의 [[오사카시]]를 포함한 [[오사카부]]의 북부와 [[고베시]] 일부를 포함한 [[효고현]] 남동부에 해당.] 미시마(三島)군[* 지금의 오사카부의 미시마군]의 지방영주이다. 아버지 다카야마 도모테루(友照)가 당주를 하던 무렵, 다카야마 가문은 [[미요시 나가요시]](三好長慶) 휘하의 무장으로 [[마츠나가 히사히데|마쓰나가 히사히데]](松永久秀)를 따르고 있었다. 1552년 우콘이 태어났으며, 12세 무렵에 기리시탄으로서 [[세례성사]]를 받았다고 하는데, 부모 대에 이미 [[예수회]]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. [[1564년]] [[미요시 나가요시]]의 사망으로 미요시 가문은 몰락일로를 걷고, [[1568년]] [[아시카가 요시아키]](足利義昭)가 [[쇼군]]위를 물려받으면서 셋쓰의 정세는 급변한다. 요시아키는 셋쓰 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, 다카야마 가문은 세 다이묘 중 하나인 와다 고레마사(和田惟政)에 종사한다. 하지만 좁은 셋쓰 땅이 셋으로 나누어지면서 영토를 놓고 서로 다투는 혼란상이 벌어진다. [[1571년]], 다카무라 가문의 주군인 와다 고레마사가 또다른 셋쓰 지역 [[다이묘]]인 이케다(池田) 씨 휘하의 [[아라키 무라시게]](荒木村重) 등에 패배한다. 승기를 탄 아라키 무라시게는 이케다를 배신하고 [[오다 노부나가]]와 결탁, 셋쓰 땅따먹기에 돌입하고 결국 다이묘 지위에 오른다. 한편 다카야마 도모테루(우콘의 아버지)와 우콘은 와다 고레마사를 계승한 고레나가(惟長)와 사이가 틀어져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. 다카야마 부자는 아라키 무라시게의 조언을 얻어 주군을 칠 계획을 세운다.[* 참고로 [[아라키 무라시게]]는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,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위인이다.] [[1573년]] 고레나가가 화해를 청하는 척하며 살해하려는 계략으로 다카야마 부자를 소환하자, 다카야마 부자는 가신들을 이끌고 고레나가를 야습하였다. 고레나가는 황급히 고향으로 도망치고, 다카야마 가문은 승리했다. 하지만 우콘은 야습 중 아군의 실수로 거의 목이 베이기 직전의 중상을 입고 겨우 목숨만 건졌다. 이후, 다카야마 부자는 와다 가문의 2만석 영지를 흡수하여 다카쓰키(高槻)[* 지금의 [[오사카부]] 다카쓰키시] 성주가 되었다. 그리고 도모테루는 50세가 되자 우콘에게 성주의 지위를 양위했다. [[1578년]] 아라키 무라시게가 갑작스레 [[오다 노부나가]]에 반란을 일으켰다. 우콘은 은인인 아라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. 반란을 진압하러 온 노부나가는 선교사와 기리시탄들의 목숨으로 다카야마를 위협하였다. 고민에 빠진 우콘은 성을 무라시게에게 돌려주고, 가족들을 성에 남겨둔 채 단독으로 노부나가에 투항했다. 다카야마 우콘과 [[나카가와 키요히데|나카가와 기요히데]](中川淸秀) 등의 이반으로 아라키는 결국 패하여 모리(毛利) 가문에게 도망치고 만다. 이 공으로 우콘은 성을 돌려받고 4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게 된다. [[1582년]] 노부나가의 [[사망]] 이후, 우콘은 [[아케치 미츠히데|아케치 미쓰히데]](明智光秀)의 세력에 들어가길 거부하고 [[도요토미 히데요시|하시바 히데요시]](羽柴秀吉, 도요토미 히데요시)의 막하에 들어가 분전했다. 다카야마는 전쟁 중에 [[아즈치 성|아즈치(安土) 성]]에 있던 세미나리오(seminário: [[신학교]])를 자신의 본거지인 다카쓰키 성으로 옮기기기도 했다. 이후에도 히데요시 휘하에서 다양한 공훈을 세웠으며, 우콘의 영지도 착착 넓어져갔다. 그 와중에도 포교활동은 계속 되었으며, 그의 인덕에 이끌려 기리시탄 영주들은 크게 늘어났다. 유명한 인물로 [[구로다 간베에|구로다 요시타카]](黑田孝高, 곧 구로다 간베에)는 세례를 받았으며, [[호소카와 타다오키|호소카와 다다오키]](細川忠興), [[마에다 토시이에|마에다 도시이에]](前田利家) 등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. 그와 동시에 영지 내의 절과 신사를 허무는 정책을 실시했고, 신도나 불교 측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컸음은 당연지사. [[1585년]]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. 이에 기리시탄 무장들까지 압박을 받게 되었고, 구로다 간베에 등 종교를 포기하는 경우도 속출했다. 우콘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지와 가산을 포기할 것을 천명했고, 스스로 추방자가 되었다. 이후 기리시탄 영주인 [[고니시 유키나가]]의 영지로 들어가 은거했다. [[1588년]]부터는 기리시탄에 호의적이던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의탁했는데, [[1590년]] 오다와라의 싸움에는 추방자의 몸으로 마에다군에 종군하여 가네자와(金澤) 성을 쌓을 때 뛰어난 건축술을 보이기도 했다. 이후 마에다 가문의 상담역으로 활동했다. [[1614년]] [[도쿠가와 이에야스]]가 기리시탄 추방령을 내리자, 우콘은 마에다의 영지를 떠나 가족과 함께 [[선교사]]들을 따라 [[필리핀]]의 [[마닐라]]로 떠난다. 마닐라에 도착해 신앙의 수호자로 대환영을 받기는 했지만, 노령의 몸으로 장거리 여행은 무리였는지 병을 얻어 1615년 [[향년]]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. 그의 후손들은 귀국을 허락받아 다시 [[일본]]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